걱정이야기
Ⅰ. 걱정고리
요즘 여기저기에서 걱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차 가진 사람은 기름값 걱정, 대학생은 등록금 걱정, 주부는 시장바구니 물가걱정, 기업주는 파업걱정, 펀드하는 자는 주가걱정, 회사원들은 구조조정걱정, 어린자녀를 둔 부모는 납치범 걱정, 그리고 정부는 북핵 걱정 등등…. 이것저것 모든 걱정꺼리들을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이런 걱정은 우리 보통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린 먹을꺼리 때문에, 입을꺼리 때문에, 잠잘꺼리 때문에, 볼꺼리 때문에, 놀꺼리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아 걱정에서 눈을 뜨고 걱정에서 눈을 감는 걱정 고리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속을 떠난 수도자들도 걱정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곳 수도자의 세상에도 걱정꺼리가 꽤나 많은 가 봅니다. 불교에서는 108번뇌라 하여 108가지 걱정 방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벗어나야 비로소 그들만의 걱정세상에서 해탈한다고들 합니다. 기독교에서도 피정이 있습니다. 이 피정을 통해 그들만의 걱정세상에서 벗어나는 수도법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이유로, 저런 사람은 저런 이유로, 그런 사람은 그런 이유로, 특별한 사람은 특별이유로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걱정이 많아도 문제지만, 걱정이 없다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익숙한 ‘걱정주제’를 갖고 독자여러분에게 다가가고자 합니다.
Ⅱ. 걱정 없는 사람도 사람인가?
보통 사람들은“걱정 없는 낙원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꿈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저도 한때 이런 야무진 꿈과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답니다. 가수 이수영의 ‘얼마나 좋을까?’를 열심히 배우며 불렀던 때라고 기억 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야무진 꿈을 가진 순간이 아니었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걱정이 없음은 곧 인간이기를 부정하고 비인간이 되기를 선언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 데까르트는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은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리고 또 의심하는” 행위를 한순간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깨닫는 참 인간으로 태어나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터득하는 이치도 첫걸음마가 걱정과 염려, 그리고 의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먼저 의심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데까르트의 말을 적용하면, 걱정을 벗어나려면 먼저 걱정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믿어야 진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심의 검증과정을 철두철미하게 거친 진리가 참 진리로 얻어진다는 데까르트식의 패러독스해법인 셈입니다.
걱정 없는 세상, 고민 없는 세상을 꿈꾼다면 먼저 그 걱정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어야할 것 같습니다. 걱정 없는 삶을 원한다면, 우린 그 걱정 속에 머물고 그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걱정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길을 찾게 되고, 이렇게 얻은 것이 진정한 삶의 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씨가 어느 강연에서“시인이 울면서 쓰지 않은 시는 독자도 울면서 절대로 읽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정말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걱정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철저한 걱정세상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걱정의 지평선 넘어 안정과 평화의 신천지로 진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혜안을 얻는 수도자들의 고행과 번뇌들은 우리 보통인에겐 바로 걱정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걱정의 근원은 ‘긍정적 욕구, 바람, 동기, 희망’에서 배아(胚芽)됩니다. 저는 한 술 더 떠 ‘걱정, 불만, 고민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즉 역사의식이나 창조의식이 없는 생물학적 존재이기를 고집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생물학적 존재만을 갈구하였다면, 인간은 오늘날과 같은 빛나는 문명과 기술의 역사를 만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빠져 무화과를 먹지 않고 걱정 없는 낙원세상만을 고집하였다면, 지금의 인간문명의 역사와 그 진화는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걱정은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거나 머물게 하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의 모습, 더 진보된 미래의 발전을 위한 인류의 비전이요, 개인에겐 진화의 생명수와 같은 것입니다. 최근 일본의 동경대학교 한국계교수인 강상중교수가 펴낸 저서‘고민하는 힘’은 일본열도를 휩쓸며 작년 한 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해탄을 건너와 한국에서까지 그 열기가 식지않고 있답니다. 강 교수는 이 저서에서 ‘삶의 원천적 에너지’가 ‘고민’즉 걱정임을 설파한 것입니다. 고민이나 걱정을 피하는 간접화법의 삶이 아닌 이 고민과 걱정과의 정면 대결하는 직접화법의 삶을 현대인에게 속속들이 들추어내어 독자들의 감성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주변엔 이런 현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의 건강과 안전을 넘어 타인의 건강과 안전을 걱정하는 일, 나의 불행을 넘어 타인의 불행을 염려하는 일, 자신의 동족을 넘어 타 동족을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 등등… 그런 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혹자는 자기의 눈앞도 가리기 힘든 세상에 남의 걱정과 고민에 매진하는 자를 보고 경시하거나 비아냥하는 태도를 가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린 압니다. 인간이 되는 길, 참인간이 되는 길은 인간자체를 포기할 정도의 고민, 걱정, 불만, 고통의 과정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문뜩 이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새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좋은 인간의 되려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Ⅲ. 촛불시위와 조문행렬의 걱정
사람들은 작년도의 미국 소고기촛불시위, 그리고 금년 5월의 노전대통령서거 조문행렬을 보면서, 단순한 걱정을 넘어 이상(異常)한 방향으로 정국을 몰고 가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답니다. 이런 걱정도 이해가 갑니다. 이런 걱정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고, 행동으로 촛불시위나 조문행렬의 참여와 꼭 같은 행동걱정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모두가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가치와 문화의식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내면동기의 발로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걱정 없이는 결코 인간의 문명진화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절대적 존중’의 시대가 아닌 ‘상대적 존중’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학교나 대학이 사회와 정부를 이끌고 가는 중세나 근대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 사회, 기업, 그리고 정부가 학교와 대학을 이끌어가는 초현대시대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를 이끌어가는 것도 더 이상 교사가 아닙니다. 그 주체는 바로 학생, 학부모, 또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방정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 김문수 지사가 정부의 사교육대책에 대한 지적에 공감을 넘어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명박정부의 청와대와 교과부가 나서서 학생과 학부모의 심야과외의 금지문제를 논의하던 시점이었습니다.“이 세상에 학생과 학부모가 자기 돈 들여 꼭 필요해서 밤늦게라도 공부하겠다고 하는 데 청와대나 정부나 나서서 하지 못하게 막는 그런 민주국가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라는 지적과 아울러 교과부 폐지론을 주창하였습니다. 문명사회나 성숙한 인간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강제나 타율적으로 정하지 말고 구성원들의 자율에 맡겨서 그 원칙을 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지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장의 이면에는 원하고 필요한 자의 절박함이 우선되고 존중되는 그런 민의가 반영된 국정운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훈계도 깔려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김 지사의 인식은 ‘옳고, 바르며,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시민은 그 누구든 다양한 걱정을 분출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초등생의 주장도 옳고, 대학생의 생각도 옳고, 농부의 생각도 옳고, 회사원의 생각도 옳고, 주부의 생각도 옳고, 실직자의 생각도 옳고, 하급공무원의 생각도 옳고, 고급공무원의 생각도 옳고, 서민의 생각도 옳고, 지도자의 생각도 옳고 등등… 모두가 다 옳은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누구 이외의 생각은 옳지 않다는 그런 권위적 발상은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우선되는 가치란 우리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개인의 기본권 즉 개인의 걱정일 것입니다. 개인의 기본권인 인권, 생명, 자산, 안전에 대한 걱정은 그 무엇과 대체될 수 없는 원초적 가치로 받아 들어져야 하며 이의 걱정과 고민은 문화와 가치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참다운 삶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의 계급사회, 계층사회, 권위사회, 신분사회에서는 누구의 가치를 누구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암묵적인 지지가 용납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그런 사회와의 단절과 청산을 위해 걱정, 고민, 불만을 넘어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훌륭히 치른 민주국민들입니다.
아직도 권위적 발상에 젖어서 나라 일을 보살피고 국정을 살핀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국정운영영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공산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 그 중국이 인구 1억 2천만 명이 사는 쓰촨성에 작년 지진강도 8.2의 강진이 강타하여 쑥대밭을 만들었을 때에, 제일 먼저 원자바오 총리가 현장으로 달려가 우는 아이를 달래며, "비스킷 줄게 우유 줄게 울지 마! 아가야." 그리고 구조하는 인민해방군을 향해 "인민이 너희들을 키운 거야 이제 보답할 차례야." 하면서, 희생자 유가족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면서 고통을 분담하는 장면을 보는 이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중국은 지진으로 쓰촨성의 일부를 잃었지만, 세계에 흩어져 사는 중국인을 하나로 엮는데 성공하였다고 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진타오 주석이 쓰촨성에 방문하였을 적에 최고통치자의 오랜 상징인 빨간 카펫이 깔린 모습을 보고 주변의 관계자를 호되게 야단치고 즉각 치우게 하는 등 국민 속에 지도자가 항상 함께 하는 새로운 인민지도자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국민이 선거해서 뽑은 통치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 지도자들은 선거철을 잠깐 제외하곤 항상 첩첩의 권력 인맥 띠에 겹겹이 싸여 국민의 참 소리를 듣기가 어렵고 들을 수 없으니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취임 후에 당신이 만들었고 국민들은 이에 보은으로 대통령을 만들어준 그 청계천에 물이 잘 흐르는지, 그곳에서 모여 사람들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지 직접 체험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하였더라면, 취임 초에 이러한 역사상 초유의 국정난맥이란 좌초에 직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잘 준비된 지도자로서의 풍부한 역량들을 조기에 국민을 위해 하나씩 하나씩 실천에 옮겨갈 수 있는 적기를 맞이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 말해도 들어주는 자가 없는 사회, 걱정을 해도 그 걱정을 헤아려 주는 곳이 없는 사회, 이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의 시위요, 무언의 행진일 것입니다. 과거의 대자보문화가 그랬고, 삼보행렬이 그랬고, 분신자살이 그랬고, 지금의 촛불시위, 그리고 조문행렬도 그러한 걱정의 분출구인 셈입니다. 배후가 있든 없든, 누구의 조정을 받든 안받든 그것은 우선고려의 문제가 아니라 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자들이 바로 머슴(이대통령 국민섬기기 표현을 옮김)이 돌보고 지켜야할 신성한 국민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시민이 거리를 나와 말할 것이 있다면, 그전에 먼저 알고 나오지 않아도 되게 해결해 주어야 할 것이 머슴의 몫이고, 머슴도 사람이라 잠시 한 눈판사이에 신성한 주인의 요구를 잠시 귀 기울지 못하였다면, 중국의 원자바오처럼 버선발로 뛰어나와 읍소하고 무조건 그 청을 수용하는 것이 머슴이 주인에 대한 기본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우리의 머슴들은 할말이 많이 남아있고 우리국민이 알지 못하는 국제관례 등의 핑계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안이한 발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재협상보다 국제관례가 그만큼 국민의 안녕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이었다면, 국제전문가들을 총동원하여 땀과 눈물을 다해 소시민들의 이해를 구하는 일을 한결같이 했어야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국민의 안녕과 국익을 위한 최선책이라 서둘러 했는데 국민이 원치 않으니 제가 한 것은 국민의 안위를 위한 것 같지 않다.” 라고 왜 말 못하는 지 답답할 뿐입니다.
Ⅳ. 걱정의 본질이란?
걱정이란 “안심이 되지 않아 속을 태움”이란 심리적 현상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적절한 걱정은 문제해결이나 과업성취에 효과적이라 말합니다. 한 가지 예로 시험에 대한 걱정은 시험 준비 태도를 강화하여 원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걱정과 고민은 불안과 다르고 공포와 정신장애와 전혀 다른 성질입니다. 물론 걱정이 지나쳐 공포장애, 강박장애, 범 불안장애 등은 병리적, 심리적 장애를 가진 이상성격으로 변질될 수도 있답니다. 기름값 걱정을 하고, 소고기 걱정을 하고, 등록금 걱정을 하는 것은 좋은 신랑을 갖겠다는 꿈이나 좋은 직장에 다니겠다는 꿈과 거의 대등 소이한 건강한 심리적 욕구 메커니즘에서 나온 바람입니다.
걱정이 너무 많거나 상습적인 걱정불안을 가진 경우에는 여러 가지 병리적 장애현상을 수반하지만, 일상적인 수준의 걱정을 갖는 것은 여러 장점들을 가집니다. 일에 대한 주의집중력을 높일 수 있고, 주변의 문제 상황이나 위협상황을 민감하게 포착하거나 주시할 수 있고, 나아가서 목표달성을 위한 추진력을 높일 수 있게 됩니다. 누구든 현대인은 걱정이 끈을 잡고 살기 마련입니다. 개인의 걱정이든, 가정의 걱정이든, 직장의 걱정이든, 나라의 걱정이든, 날씨의 걱정이든, 그 무엇에 관한 걱정이든 한시도 걱정의 끈을 놓고 살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개인이나 가정의 걱정보다 직장/나라의 걱정, 직접적인 연관이 낮은 이국나라의 기아, 인권, 평화 걱정을 하는 것은 한 단계 성숙된 현대인의 글로벌 덕목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인을 걱정하는 선교활동, 북한어린이의 기아를 걱정하는 모금활동, 철부지어린이의 광우병을 걱정하는 촛불시위, 내 부모가 아니지만 국가를 5년 동안 통치한 지도자의 불행한 서거를 슬퍼하는 조문행렬 등등… 이 모든 걱정들은 범 인류애적인 박애걱정에서 나온 신성한 인간됨을 위한 행위인 것입니다.
Ⅴ. 걱정은 현대인의 문화와 가치의 동인
나의 후배이자 동료교수이었던 부산대학교 L교수는 사회단체법인인 ‘어린이를 걱정하는 모임’을 설립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간 성공적 운영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얼마나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어린이에 대한 학습권리, 행복권리, 놀이권리, 안전/위생권리, 생명존중권리 등을 등한시 하였기에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자세히 우리사회의 이모저모를 면면히 살펴보면, 아동학대, 아동폭력, 걸식아동, 버려진 아동, 심신장애아동, 불우아동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이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잘못된 이탈사고와 행동을 가진 자가 아니라 고도의 성숙된 인격을 소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걱정은 바로 현대인의 핵심적 정신인 문화와 가치의식의 발로이며, 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촛불시위를 가로막는 전경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현상 그 자체 보다 더 우위의 가치는 그 초등학생이 자기의 문제를 넘어 타인의 문제, 그것도 미래 대한민국에 살게 될 사람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산 교육의 계기로 성찰해 볼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편리함이나 귀찮아함을 포기하고 나 이외의 타인의 문제나 일에 관심과 걱정을 갖는 경험을 갖는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을 염려하는 마음, 나아가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은 분명히 큰마음에서 연유한 행보임에 틀림없답니다. 이러한 큰마음은 많이 배운 자, 가진 자, 신분이 있는 자, 경륜이 있는 자, 나이든 자, 고급관직을 가진 자 등으로 부터 술술 나와야하는데 그동안의 관례를 보면, 이들로 부터는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흘린 피, 땀, 눈물의 대가를 줍거나 평가하는 일들에만 연연하여 왔습니다.
사실 그동안의 관례를 보면, 갖지 않은 자들, 소외한 자들로 부터 시대가 원하는 큰 마음들이 나왔고 그 마음들이 이루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답니다. 우린 누가 국민과 나라를 염려하는 가를 따지기보다 이들 큰마음을 가진 모든 이를 귀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여기고 이들의 걱정들을 경청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최고 지도자는 가신이나 심복, 정보기관, 신문이나 공중파TV 뉴스 등에만 귀를 열고 의존해서는 결코 ‘살아있고 숨쉬는 걱정’에 접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기억하지 않습니까. 평가는 상이하지만, 위기의 국가를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역대지도자중 가장 국정운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J전직대통령은 시간 나는 대로 청와대의 춘추관 앞마당에 막걸리 통을 내다놓고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수시로 불러 막걸리 잔을 기울면서‘살아있는 걱정’을 진정으로 경청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떠오릅니다.
걱정 없이 살 수 없는 현대인에게 잠시나마 찌든 걱정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갖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더 건설적인 걱정을 많이 갖기 위해서 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내한공연을 한 적이 있는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의 “Don't worry be happy" 음악을 시간이 나면 한번쯤 들어볼 것을 독자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그는 그래미상 등 주요수상경력이 10차례나 됩니다. 국내 팬들에겐 요요 마와 함께한 앨범 ‘허쉬’로 유명합니다. 기회가 되면 그의 음악을 감상하면서 잠시나마 이런 저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와 명상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가사의 내용은 “살다가 보면 이런 저런 걱정꺼리 밀린 월세를 내지 못해, 여자친구가 없어, 카드 빚을 갚지 못해, 밀린 월급을 받지 못해 연이은 걱정을 안고 살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이며 인생이니,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지자 즉, Don't worry be happy."라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만이라도 ‘생각하는 로댕’이 아니라 ‘걱정하는 로댕’이 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끝♥
2009년 6월 15일
칼럼니스트 이 영 석 박사